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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근처에 살면서도 한 번도 방문해보지 않았던 해방촌의 스토리지 북 앤 필름에서 뜻밖의 가슴 따듯해지는 책을 발견했다.

친구와 하릴없이 시간을 때우러 들어갔던 작은 서점은 온통 들춰보고싶은 유혹이 넘치는 책들로 가득했다.

딱히 소비를 하러 들어간것도 아니었는데, 그 많고 많은 책 중에서 <Betsy without “S” 무면허 번역가의 번역이야기> 라는 제목의 귀엽고 심플한 일러스트로 꾸며진 책이 눈에 띄었다.

그 이유는 우선 나는 지금 번역업계에 발끝을 아주 조금 담고있기도 했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자 각종 정보를 찾아다니고 있기도 한 탓이다. 

 

프롤로그의 "좋은 번역이란 무엇인가? 이 '최적의 숟가락'의 기준은 작품마다, 또 작품에 대한 번역가의 해석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번역만이 가지고 있는 미학이 탄생한다."라는 구절을 보고 꼭 찬찬히 이 글을 읽고 싶어 졌다. 

오로지 요율과 소화해내야할 단어수에 치이며 의미 없는 활자를 기계처럼 번역해오던 나에게 언어의 미학과 해석이라는 의도를 넣어 번역이 예술로 읽힌다는 건 지치고 메마른 나의 가슴에 알 수 없는 불씨를 일으켰다.

 

나는 어렸을적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럴만한 환경이 갖추어지지도 않았지만 용돈을 모아 좋아하는 책의 원서를 사고는 했다.

<무면허 번역가의 번역이야기>의 작가처럼 나도 유년시절의 한구석에 아주 소중하게 자리 잡고 있는 책이 있다. 

다른 점은 작가는 원서를 먼저 접했지만 나는 번역본을 먼저 접했다. 

읽고 또 읽어서 눈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의 생김새, 습관, 옷차림을 넘어서 햇볕이 머리카락에 닿으면 어떤 식으로 빛나는지, 콧대는 어떻게 뻗어있는지, 속눈썹의 분위기와 눈동자 색의 빛까지 원작을 넘어서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그러다가 더욱 많은 '느낌'을 떠올리고 싶어 원서를 찾아 읽게 되었던 것이다. 

순서는 달랐어도 어느 이야기를 온전히 내 것으로 느낀 경험을 다른 이의 서술을 통해 바라보는 것은 색다르고도 즐거운 사건이었다.

잃어버린 동심을 다시 조우하게 된 느낌이랄까.

 

어렸을 적엔 현재와는 달리 무엇이든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역치의 폭이 두터웠다.

작가처럼 그 이야기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10년에 걸쳐서 번역을 하고, 문장을 입에 머금어보고, 상상에 잠길 수 있다는 건 어떻게 보면 축복인 거 같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 축복을 선사받았는데 그저 잊기만 한 게 아닐까 싶다.

 

오로지 작가만의 작품인 <백조의 여름>과 함께 자라오며 지금도 어딘가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을 사라와 찰리, 그리고 수많은 책 속의 주인공들, 그리고 나의 이야기 속 친구들에게 비록 지나치는 독자지만 따듯한 마음을 보내본다.

앞으로도 너희를 잊지 않고 사랑을 잃지 않기를.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7526672

 

Betsy without "S"

작가 이름의 글자 S를 빼먹을 정도로 엉망진창 번역가인 나. 10년 간 홀로 해온 나의 번역은 과연 가치있을 수 있을까? 14살 중학생 시절 영미 청소년 작가 Betsy Byars의 『The Summer of the Swans』 원서

boo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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