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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융의 회고록 <기억 꿈 사상>을 읽다.

 

어느 날 칼 융의 책을 찾아 읽어보라는 추천을 지인에게 받게 되었어요.

수많은 저서 중 그의 개인적이 이야기와 일생을 살펴보고 싶어 칼 융의 첫 책으로 <기억 꿈 사상>을 선택했습니다.

 

유년 시절부터 시작해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역사를 섬세하고 사실적이게 담아내었습니다.

 

그에 대한 배경지식이 하나도 없던 상태에서 읽기 시작해서 신과 영성에 대한 주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게 꽤나 인상적이었어요. 제가 평소 관심이 많기도 하고 그쪽으로는 나름 진지하게 고민도 했던지라 정신분석학이라는 어떻게 보면 고도의 이성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을 거 같은 그가 본인의 내밀하고 형이상학적인 측면을 이렇게 거리낌 없이 고백했다는 거에 무척 감동받기도 하고 심장이 두근대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본인의 사후에 발간해달라고 했다는 게 더욱 이해가 가요.

본인이 체험하는 환상이란, 타인의 시선엔 말도 안되고 정신 나가 보이는, 혹은 미쳤다고 손가락질받을만한 위험성을 지니고 있거든요. 

 

책의 중간을 넘어갈수록 사건에 대한 설명을 넘어서 칼 융의 내면의 목소리를 점점 더 많이 들어 볼 수 있었는데요, 구절 하나하나 공명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래로 몇몇 단락을 나눠보려 합니다.

 


 

내가 돌이라고 생각하자 갈등은 멈췄다. ‘돌은 불확실한 것도 없고 자기를 알려서 전하려는 욕구도 없다. 돌은 영원하며 수천 년 동안 살아 있다.’ 나는 생각을 이어갔다. ‘이에 반해 나 자신은 단지 지나가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 급히 타올랐다가 꺼지는 불꽃처럼 가능한 온갖 종류의 감정에 불살라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내 감정들의 집합이었으며, 내 안의 다른 존재는 시간을 초월한 돌이었다.

 

 

학교 과목에는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칸트나 쇼펜하우어, 또는 고생물학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것처럼 젠체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충격적인 확인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실제로 모든 화급한 문제들은 일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어릴 적 비밀이 그러했듯이, 신의 세계에 속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신의 세계’라는 표현이 어떤 사람에게는 감상적으로 들리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모든 ‘초인간적’인 것들, 눈부신 빛, 심연의 어두움, 시공의 무한성이 지닌 차가운 무감정, 비합리적인 우연세계의 으스스한 괴기성 등이 ‘신의 세계’에 속했다. ‘신’은 나에게는 모든 것이었지, 단지 ‘교화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신앙의 가장 큰 죄는 경험을 앞지르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결국 인간이란 스스로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좋든 나쁘든 다른 사람들의 판결에 맡겨진 하나의 사건인 셈이다.

 

 

마음의 진동추는 바른 것과 그른 것 사이가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환상을 기록하는 동안 나는 한번 이렇게 자문해보았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것은 확실히 과학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럼 이것은 무엇인가?” 이때 내 안에 어떤 소리가 있었다. “이것은 예술이에요.”

 

 

환상에 관한 작업을 하던 바로 그 무렵, 물론 나는 ‘이승’에 발판이 필요했다. 그것은 가족이며 직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 낯선 내면세계에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대극으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었다.

 

 

사실은 천사가 내 속에 살고 있었다. 천사는 오직 ‘천사의’ 진실만을 이해할 뿐 인간의 진실은 이해하지 못한다. 

 

 

위대한 과거의 것들은 우리가 착각하듯 죽지 않고 단지 그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영원’이라는 표현을 꺼려한다. 하지만 나는 그 체험을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하나인 무시간적 상태의 지복이라고밖에 달리 일컬을 말이 없다.

 

 

나는 병을 통하여 또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었다. 주관적인 반론 없이 말이다. 현존재의 조건을 내가 보는 그대로, 내가 이해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안전한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은 죽은 자의 길일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어떻든 그건 바른 길이 아니다. 안전한 길을 가는 자는 죽은 것과 다름없다.

 

  

병을 앓은 후에 비로소 나는 자신의 숙명을 긍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그럼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도 자아는 굴복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참아내며 진리를 견디며 세계와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패배에서도 승리를 체험하게 된다.

 

 

합리주의와 교조주의는 우리가 앓고 있는 시대병이다. 그것들은 모든 것을 아는 체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인생이 현존을 넘어서 무한정한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훨씬 더 이성적으로 잘 살며 더욱 편안해질 것이다. 사람은 수백 년을, 상상할 수 없는 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런데 왜 이와 같이 헛되이 분주하기만 한가?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신화는 과학의 맨 처음 형태다. 

 

 

나의 존재의미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

 

 

‘아, 그렇구나. 그 사람이 나를 명상하고 있었구나.’ 그가 하나의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나다. 그가 깨어난다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나는 인간의 의미와 신화에 관한 이와 같은 생각으로 모든 것을 다 말했다고 착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람 모습의 아쿠아리우스(물병자리)시대를 앞두고 현재 물고기시대 말기에 언급될 수 있고 아마도 언급되어야만 하는 것을 내가 말했다고 확신한다. 물병자리는 두 개의 대립적인 물고기(일종의 대극융합) 뒤를 따르면서 ‘자기’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여유만만하게 그 항아리물을 남쪽 물고기 입에 부어넣는다. 물고기는 아들, 즉 아직 무의식적인 것을 나타내고 있다.

 

 

자신의 다이몬(Daimon)의 충동에 따라 감히 중간단계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않은’ 곳에 정말로 이르게 된다. 그곳에는 그를 인도할 확실한 길도 없고 그를 보호할 지붕이 있는 집도 없다. 또한 예측하지 못한 상황, 이를테면 대강 해치울 수 없는 의무들의 충돌 같은 상황에 직면했을 경우 그 문제에 대처할 어떤 법칙도 없다. 대개 그와 같은 의무들의 충돌이 나타나지 않는 동안만 ‘사람이 없는 땅’으로의 여행이 계속되다가, 의무들의 충돌이 멀리서 낌새를 보이기만 해도 그 여행은 급히 끝나버린다. 그때 그가 도망친다 해도 나는 그것을 그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나약함과 비겁함에서도 공로를 내세우려 한다면 나는 그를 칭찬할 수 없다. 나의 경멸이 그에게 해가 되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그에 대한 경멸을 조용히 표명할 수 있을 것이다.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아마도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다른 사람보다도 더 많이 필요로 하고 동시에 훨씬 덜 필요로 한다고 말이다. 다이모니온이 작용하고 있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항상 너무 가깝고 너무 멀다. 다이모니온이 잠잠해진 곳에서만 사람들과 중간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나는 내 인생이 그렇게 지나간 것에 만족한다. 내 인생은 풍성했으며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어떻게 내가 그토록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동안 일어난 것들은 그야말로 기대 밖의 일들이었다. 나 자신이 달라졌더라면 많은 일이 다르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되어야 하는 대로 그렇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생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형이상학적 문제가 그렇듯이 아마도 양쪽이 다 진실일 것이다. 인생은 의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또는 인생은 의미를 가지기도 하고 가지고 있지 않기도 하다. 나는 의미가 우세하여 전투에서 이겼으면 하고 마음 졸이며 희망하고 있다.

 

 


 

어쩌다 보니 몇몇 구절이 아니게 됐네요^^

사실 마음만 같아 선 책 통째로 올리고 싶을 만큼 읽는 내내 보물 덩어리 같았답니다.

 

 

 

마지막으로 칼 융의 생전 인터뷰를 올리려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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